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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이야기

통밀가루 - 가을·겨울 빵의 밑그림이 되는 곡물의 얼굴

계절이 바뀌면 자주 찾게 되는 재료가 있어요.

여름엔 상대적으로 손이 잘 안 가지만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갑자기 생각나는 재료.

통밀가루 예요.

 

같은 빵인데 통밀이 들어가면 훨씬 진하고, 깊고, 든든해져요.

아마 저만 그런 게 아닐 거예요.

 

먼저 통밀가루가 뭔지 짚고 갈게요.

우리가 평소 쓰는 밀가루(강력분·중력분·박력분)는

밀알의 하얀 속살(배유) 만 골라서 곱게 빻은 거예요.

밀알의 껍질(밀기울)과 씨눈(배아)은 대부분 제거돼요.

 

통밀가루는 다르게 만들어져요.

밀알을 껍질까지 통째로 빻아요.

그래서 색이 갈색이고, 알갱이가 굵고, 향이 훨씬 진해요.

밀 본연의 맛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재료예요.

 

정리하면 통밀은 일반 밀가루와 이런 점들이 달라요.

 

1. 흡수율이 훨씬 높아요

밀기울이 물을 많이 머금기 때문에 같은 반죽이라도 물을 더 넣어야 해요.

강력분 100%로 가수율 65%였다면 통밀 100%는 75~80% 정도 필요해요.

 

2. 글루텐 형성이 약해져요

밀기울이 글루텐 그물망 사이에 끼어들어 글루텐 발달을 방해해요.

그래서 통밀 100% 반죽은 글루텐이 덜 잡히고 빵이 무거워요.

 

3. 발효 시간이 짧아져요

통밀에 자연적으로 포함된 효소가 발효를 촉진해요.

같은 이스트 양이라도 통밀 반죽은 1차 발효가 20~30% 빨라요.

 

4. 색과 향이 진해져요

굽는 순간 훨씬 진한 갈색이 나오고 곡물 향이 깊게 남아요.

 

통밀가루를 사용할 때 궁금해지는 게 "100%로 만들까, 블렌드로 만들까?" 예요.

R&D에서는 이렇게 나눠요.

 

통밀 100%

  • 밀 본연의 맛을 극대화
  • 빵이 무겁고 촘촘함
  • 소화가 어려울 수 있음
  • 통밀빵·홀그레인 브레드에 적합

통밀 50% + 강력분 50%

  • 통밀 향은 유지하면서 부드러움도 살림
  • 홈베이커에게 가장 편한 비율
  • 캉파뉴·시골빵·건강빵에 어울림

통밀 20~30% + 강력분 70~80%

  • 통밀은 은은한 향과 색으로만 활용
  • 크럼이 부드럽고 결이 살아 있음
  • 식빵·모닝빵에 활용 가능

처음 통밀을 다뤄보시는 분에게는 30% 블렌드부터 시작하는 걸 추천해요.

바로 100%로 가면 반죽이 무겁고 크럼이 답답해서 "통밀은 어렵다" 는 인상이 남아요.

 

 

통밀 다룰 때 팁 세 가지

 

1. 오토리즈를 반드시 하세요

밀가루+물만 미리 섞어 20~60분 휴지시키는 과정이에요.

통밀은 물을 늦게 머금기 때문에 오토리즈로 미리 흡수 시간을 주면 반죽이 훨씬 잘 다뤄져요.

 

2. 이스트 양을 조금 줄이세요

발효가 빨라지니 평소 이스트 양보다 10~20% 줄여요.

그래야 과발효를 막을 수 있어요.

 

3. 반죽 시간은 짧게, 휴지는 길게

글루텐 발달이 약하니 오래 반죽해도 큰 효과가 없어요. 차라리 반죽은 짧게 끝내고 중간 휴지(스트레치 앤 폴드) 를 여러 번 넣어요.

이게 통밀 반죽의 결을 살리는 R&D의 정석이에요.

 

시장에서 통밀가루를 고를 때 알아두면 좋은 것도 짚어볼게요.

 

국산 통밀 vs 수입 통밀

  • 국산 통밀: 단백질 함량 약 11~12%, 향이 부드러움
  • 수입 통밀 (미국·캐나다): 단백질 12~14%, 글루텐 강함

전립분 vs 통밀가루

  • 전립분(全粒粉): 통밀가루의 다른 이름. 같은 의미
  • 통밀가루: 일반명

입자 크기별

  • 곱게 빻은 통밀: 부드러운 빵에 적합
  • 거칠게 빻은 통밀: 시골빵·캉파뉴의 식감

여름엔 왜 통밀이 잘 안 어울릴까요?

여름의 반죽은 가벼워야 해요.

땀 흘리는 계절이니 무거운 빵보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빵이 좋아요.

 

근데 계절이 서늘해지면 빵도 좀 더 든든하기를 바라게 돼요.

곡물의 진한 향, 씹을수록 올라오는 깊이, 차가운 커피와 곁들여 먹었을 때의 무게감.

이 감각이 가을·겨울 빵의 얼굴이에요.

통밀은 그 얼굴의 밑그림이 되는 재료예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재료도 계절이 있어요.

여름의 재료가 있고, 가을의 재료가 있고, 겨울의 재료가 있어요.

 

같은 밀가루라도 어떤 계절엔 잘 어울리고 어떤 계절엔 살짝 어긋나요.

계절이 재료를 부르는 그 감각을 알게 되면 빵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계절이 원하는 빵을 만들게 돼요.

 

9월이 오면 저는 자연스럽게 통밀가루 봉지를 열어요.

그렇게 시작되는 오늘의 반죽이 있어요.

혹시 이 가을에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 보고 싶으시다면

 

통밀가루 30%부터 한 번 시작해 보세요.

익숙한 레시피에 통밀 30%만 더해도 빵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계절이 반죽을 부르는 그 감각.

이 가을에 한 번 만나 보시길 바라요.

 

 

 

 

 

빵을 굽는 남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