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빵을 굽는 순간들

머랭이 오르지 않던 날

 

오늘은 뭔가 기분이 괜찮은 날이었어요.
오븐은 예열되어 있었고, 반죽도 잘 됐고,
머랭만 올려 베이킹을 마무리하면 '끝' 완벽했을 텐데..

거품기는 돌아가고, 흰자는 돌고 도는데
머랭은 끝내 오르지 않았습니다.
주걱으로 쿡 찍으면 그대로 흘러내리고,
한참을 휘젓고 나서야 겨우 거품만 가득했죠.

 

왜 이럴까.
달걀 온도는 맞췄는데,
설탕도 천천히 나눠 넣었고,
볼에 물기 하나 없이 준비했는데…

그러다 문득,
"이렇게 해서 뭐가 되긴 할까?"
그런 마음이 툭 하고 튀어나왔어요. ㅠ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어요.
머랭은 여전히 흐물거리고,
주방에는 작은 정적이 흘렀어요.

실패한 거죠.


이제 와서 뭐라도 억지로 구울 수는 있지만
그게 더 아쉬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도구들을 조용히 내려놓았어요.
불도 끄고, 오븐도 식히고.
그냥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조용히 냉장고에서 달걀을 하나 더 꺼냈습니다.



이번엔 괜히 잘하려 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차분하게 시작해 보기로 했어요.

처음과 똑같은 과정인데
마음이 조금 다르니 손끝도 덜 조급했고,
결국…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은 단단한 머랭이 올라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의 실패는 참 고마운 경험이었어요.
내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빵 하나를 만들면서도 마음을 다루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줬으니까요.


 

우리는 때때로
거품처럼 올라야 할 순간에
흐물흐물한 마음으로 주저앉기도 해요.
그럴 땐 잠시 거품기를 멈추고,
내 마음부터 잠깐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죠?

 

오늘의 빵은 굽지 못했지만,
내일은 좀 더 단단한 마음으로
다시 거품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빵을 굽는 남자 올림

 

'빵을 굽는 순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게트를 굽고, 기다림을 배우다  (0)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