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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굽는 순간들

꿀의 얼굴 - 아카시아 꿀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빵에 꿀을 넣을 때

"꿀은 다 같은 꿀이지"

그렇게 생각한 적 있으신가요?

 

저도 그랬어요.

레시피에 "꿀 30g" 이라고 적혀 있으면

집에 있는 아무 꿀이나 그대로 넣었어요.

수확 시기가 다르든,

꽃이 다르든 그건 별로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느 날.

한 선배가 저한테 꿀 네 병을 나란히 놓아주셨어요.

  • 아카시아 꿀
  • 밤꿀
  • 잡화꿀
  • 유채꿀

"같은 레시피, 꿀만 바꿔서 각각 구워봐."

솔직히 그때는 큰 차이가 안 날 거라 생각했어요.

같은 밀가루, 같은 이스트, 같은 온도, 같은 시간.

꿀만 바뀌었을 뿐인데 얼마나 달라지겠나 싶었어요.

 

오븐에서 나온 네 개의 빵을 나란히 놓았을 때

저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어요.

색이 다 달랐어요.

  • 아카시아 꿀로 만든 건 은은한 밝은 갈색
  • 밤꿀로 만든 건 진한 갈색, 거의 캐러멜색
  • 잡화꿀로 만든 건 그 중간
  • 유채꿀로 만든 건 밝고 부드러운 색

한 입 먹었을 때도 네 개가 완전히 다른 빵 같았어요.

향이 다르고, 단맛의 결이 다르고,

뒷맛까지 달랐어요.

 

 

그날 알았어요.

꿀도 재료의 정체성이 있다는 걸.

R&D에서는 꿀을 이렇게 봐요.

 

아카시아 꿀

  • 향이 은은하고 산뜻
  • 색이 옅어서 마이야르 반응이 부드럽게 나옴
  • 밝은 크럼 색을 살리고 싶은 빵에 어울림
  • 브리오슈, 화이트 식빵

밤꿀

  • 향이 진하고 살짝 쌉쌀
  • 색이 어두워서 진한 갈색을 만들어냄
  • 호밀빵, 캉파뉴처럼 강한 빵에 어울림

잡화꿀

  • 여러 꽃이 섞인 만큼 향이 복합적
  • 중간 정도의 색
  • 무난하게 어디에나 쓰기 좋음

유채꿀

  • 결정화가 빠르지만 색이 밝고 부드러움
  • 크림처럼 발림
  • 마무리 코팅용, 스프레드용

꿀 안에는 이런 것들이 다 다르게 들어 있어요.

  • 당 조성 (포도당·과당 비율)
  • 수분 (18~22%)
  • 유기산 (양과 종류)
  • 미네랄과 향 성분

이 네 가지가 조합되면서

꿀마다 얼굴이 달라지는 거예요.

같은 30g을 넣어도 빵이 다른 결과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꿀을 다르게 다뤄요.

레시피에 "꿀"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어떤 꿀을 쓸지부터 정해요.

부드럽고 밝은 빵을 만들 땐 아카시아 꿀,

색과 향을 진하게 내고 싶을 땐 밤꿀,

무난한 매일 빵엔 잡화꿀, 마감용 코팅엔 유채꿀.

작은 선택 하나가 빵의 인상 전체를 결정하더라고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재료의 이름을 안다는 건 빵을 이해하는 일이라고요.

 

"꿀"이 아니라 "아카시아 꿀",

"밀가루"가 아니라 "강력분 T55",

"버터"가 아니라 "발효 버터".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순간 빵도 정확한 얼굴을 갖게 돼요.

 

같은 재료는 없어요.

 

그저 이름이 같은 재료가 있을 뿐이에요.

오늘 꺼낸 꿀병을 한 번 뒤집어서 라벨을 읽어보세요.

거기서 시작되는 오늘의 빵이 있을 거예요.

 

 

 

 

빵을 굽는 남자 올림